글 _ 이재은(충북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이럴 수가 있을까. 내가 상상하는 일들이 늘 현실로 된다면 얼마나 신기할까.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이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 내 눈앞에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겠는가. 특히, 나만 꿈꾼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꿈꾸고 상상했던 일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면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에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같은 상상을 남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민하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같은 상상을 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그것도 서로가 만나는 순간 한 쌍의 톱니바퀴처럼 상상이 현실로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만남은 기쁨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재작년 가을, 재난을 당해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김장을 담가 나눠주고 싶어 어찌해야 하나 만날 때 마다 남모르는 고민을 하는 사나이들이 있었다. 그러다 결국은 남자들끼리의 고민으로 끝이 났다. 그렇다고 아이들 키우고 식구들 먹일 김장하느라 피곤이 쌓여 있을 부인들에게 말을 꺼내는 것조차 미안했기에 누구도 집사람들을 부르자는 제안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냥 남정네들끼리 어떻게든 해보자는 심사였다. 결국은 망설임 끝에 내년도 사업으로 넘기게 되었다.

작년 가을, 여름부터 임원들과 논의를 하고 나름대로 준비를 갖춘다고 일찌감치 김장나눔준비위원회도 구성하고 위원장, 부위원장, 위원들도 선임을 마쳤다. 1,000포기를 할까 아니면 2,000포기를 할까 그리고 누구에게 나눠줘야 하는지 혹은 김치는 플라스틱 통에 담아 어떻게 나눠줘야 할 지 등등의 내용과 함께 배추는 어느 시골 마을에서 싸게 구입할 것인지 등도 개략적으로 결정하였다. 그 전 해처럼 상상이 상상으로 끝나지 않도록 준비한 덕분에 작년에는 김장 김치를 나눠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품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작년에는 시민들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노력하다 화상을 입거나 중상을 입은 소방공무원들에게도 도움을 주려고 다짐을 했던 터였다. 정말로 원하면 이루어질 것처럼, 배추 값까지 너무 쌌기에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배추 값은 폭락했지만 고춧가루를 비롯한 양념값이 폭등했던 것이다. 김장을 해서 나눠주기보다는 그냥 현금으로 지원하는 것이 더 좋았던 것이다. 결국은 김장 나눔 행사를 포기해야 했다.

올 봄, 거창한 뜻을 같이 해온 나름대로 젊고 건강한 40대 중반의 아저씨들이 모여 단골 시장 횟집에 자주 모였다. 만남의 특성상, 모이면 어디로 봉사하러 갈 것인지,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줄 것인지, 또 어떤 도움의 요청이 왔었는 지와 같은 남들 돕는 이야기와 웃음으로 즐겁기만 했다. 또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기에 늘 유익함을 느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횟집에 들른 시장 상인연합회 회장님과 횟집 주인인 부회장님, 그리고 점잖고 곱게 나이 드신 상인연합회 부녀회장님과 조우하게 되었다.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부녀회장님께서 불쑥 던진 한 말씀에 우리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지난 해, 시장 상인연합회 부녀회에서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 김장을 해서 나눠주고 싶었다고 한다. 시장 상인들의 모임이기에 배추도 있고 양념도 있고 다 있는데, 상인들이다보니 다들 장사를 해야 하는 관계로 김장 일손이 없고 또 나눠줄 곳이 없어 결국은 김장 나눔 행사를 포기했다는 말씀이다. 분명 아름다운 상상을 서로 남모르게 고민했던 이들의 만남이었다.

지난 6월 9일 청주 고속터미널 뒤,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으로 전국적으로도 꽤 유명해진 시장 상인연합회가 주최한 축제 개막식 단상에서는 행사장을 가득 메운 상인들과 수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난피해자를 함께 돕겠다는 협약식이 있었다. 올 가을, 시장 한 가운데서 김장 나눔 행사가 성대하게 펼쳐질 것을 상상한다. 시장의 배추와 양념, 시민의 일손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누군가에게 희망을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시장 상인들과 우리가 함께 꿈꾼 착한 상상들이 현실이 될 것이다.

(※ 이 칼럼은 충북일보, 2012년 6월 25일자, 아침을 열며에 게재된 글입니다.)